[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남의 집을 훔쳐보고 물건도 슬쩍 훔치는 관음증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 분)의 레이더에 먹잇감이 걸려들었다. 관종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 분)다. 편의점에서 소시지를 물고 비건(채식) 샐러드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겼다. 구정태는 한소라를 가까운 거리에서 100여 일 관찰했다.

구정태가 뒤만 쫓아다니고 더 가까워지지 못하던 차에 한소라가 직접 집을 매물로 내놓겠다고 부동산에 찾아왔다. 신이 난 구정태는 한소라의 집을 마음껏 들락날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그의 집을 찾았다 피를 뿜은 채 죽어있는 한소라를 발견했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간 구정태는 신고도 하지 않은 채 도망쳤다.

이후 손님을 이끌고 다시 한소라의 집을 찾았다. 알리바이를 위해서다. 그런데 죽었던 한소라가 사라졌다. 집도 언제 피가 낭자했었냐는 듯 깨끗했다. 이후 한소라의 사망이 알려지면서 구정태를 살인자로 모는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관음증에 도벽이 있지만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구정태가 이 누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

15일 개봉한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신예 김세휘 감독의 신작이다. 신인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실험적인 시도가 적지 않다. 그 독특한 형태가 이야기와 딱 맞아떨어진다. “누가 진범인가?”를 찾는 스릴러 장르의 매력도 충분히 살렸다. 포스트 박찬욱과 봉준호가 없다고 아우성인 영화계에 보석이 발견됐다는 평가다.

영화는 크게 전후반으로 나뉜다. 구정태의 시선으로 따라가는 전반부와 한소라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후반부다.등장 인물이 적다보니 두 사람 모두 혼자 행동하는 장면이 많다. 대사로 풀어낼 수 없는 속마음을 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빈틈을 메웠다. 덕분에 캐릭터가 분명히 잡히고, 다소 어려울 수 있는 내용도 쉽게 전달됐다.

그렇다고 뻔하고 친절한 스릴러는 아니다. 예상 밖의 사건이 급속도로 터지면서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됐다. 관객은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어떻게 이 사건이 해결될지 궁금증이 커지고 손에 땀을 쥐게 됐다. 후반부 강력한 하이라이트에 이어 악인이 사회적으로 처단되는 과정까지 군더더기가 없다.

변요한과 신혜선, 이엘의 차력에 가까운 연기력이 아니었다면 감독이 원하는 수준의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 수 있다. 변요한은 지리멸렬하면서 자기만의 계획이 있는 관음증 환자 구정태를 맛깔나게 살렸다. 분명 비호감적인 면이 많은 인물임에도 변요한이 연기하면서 정감이 생겼다. 변요한의 커다란 성장이 성큼 다가온 작품이다.

신혜선은 시종일관 거짓말을 일삼는 소시오패스 한소라에게 안쓰러움을 부여했다. 결코 올바른 삶은 아니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정당성을 덧입혔다. 후반부 액션신에서도 그 장기가 빛났다. 큰 키의 미모에서 오는 섹시한 매력과 관종 기질이 묘하게 붙었다.

이엘은 진실을 좇는 형사 오영주를 강인하고 뚝심 있게 그렸다. 오영주에게 현실감이 담기면서 구정태와 한소라의 롤이 더 빛나는 효과를 봤다. 이외에도 윤병희와 박예니, 심달기 등 조연 배우들도 열연을 펼쳤다. 적은 인원임에도 효과를 극대화 해 작품의 빈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흔히 관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고, 타인을 의식해 자신의 삶을 포장하는 게 일상으로 퍼져 있다. 영화는 타인에게 비춰지고 싶은 내 모습과 실제 사이의 간극이 커지면서 정당화와 합리화를 일삼는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발췌했다. 아울러 관음이란 키워드에 빠져 있는 두 인물로 진실의 힘을 또렷하게 보여줬다.

고민의 흔적이 깊은 이야기와 적절히 어우러진 메시지, 신선한 구조와 관객의 기분을 고려한 엔딩, 배우들의 열연 등 상업영화의 면면을 고루 갖췄다. 공식석상에서 꾸준히 “‘한산:용의 출현’보다 재밌다”고 말한 변요한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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