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성미가 급한 한 남자(현봉식 분)가 운전을 거칠게 하고 있다. 갑자기 진로를 막은 오토바이 라이더와 시비가 붙었다. 어린 라이더는 손가락 욕으로 그를 도발했다. 화가 난 운전자는 라이더를 따라가다 한 건설현장으로 진입했다. 웅덩이에서 바퀴가 헛돌고 옴짝달싹 못하던 중 차 위에 페인트가 쏟아졌다. 운전자가 욕설을 퍼붓자 갑자기 건설 현장의 벽돌이 무너졌고, 운전자는 이 사망했다.

29일 개봉하는 영화 ‘설계자’의 오프닝 시퀀스다. 마치 우연같지만 사고를 설계한 자들이 있었다. 삼광보안으로 불리는 청부 살인 업체다. 영일(강동원 분)이 리더로 트랜스젠더를 꿈꾸는 월천(이현욱 분), 경험은 많지만 치매 기질이 보이는 재키(이미숙 분), 열정 넘치는 막내 전만(탕준상 분)이 한 팀이다.

어느날 검찰총장 유력후보 주성직(김홍파 분)을 죽여 달라는 딸 주영선(정은채 분)의 의뢰가 들어왔다.영일의 팀은 주성직을 쫓던 중 잇단 사고를 겪는다. 영일은 과거 오랜 친구 짝눈(이종석 분)의 죽음과 이번 사건의 주동자가 베일에 감춰있는 조직 ‘청소부’라 여기고 강한 불안을 느낀다. 진실을 추적해 가는데 어쩐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설계자’는 청부살인을 사고로 조작한다는 소재부터 흥미를 끈다. 모든 일이 우연처럼 발생하지만, 그 안에는 정밀한 계산이 담겨 있다. 이요섭 감독은 상업영화 장편 데뷔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우연한 사고를 박진감 넘치게 표현했다. 예상 못한 타이밍에 인물들의 교묘한 행동을 연결시켰다.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게 자연스러운 연출이다.

배우들의 조합은 의외지만 합이 척척 맞는다. 강동원은 선과 악을 넘나드는 가운데 광기까지 표현했다. 굳게 다문 입에서 나오는 차가운 표정과 복잡한 감정을 색다른 얼굴로 그려냈다.

트랜스젠더를 꿈꾸는 월천 역의 이현욱은 그 어떤 여자보다 관능적이다. 마른 다리는 물론 흔들거리며 걷는 모습, 욱하는 성질에서 비롯된 귀엽고 새침한 행동이 실제 있을 것만 같은 월천을 만들었다.

이미숙은 삼광보안 멤버 재키를 깊은 내공을 가진 인물로 표현했고, 전만 역의 탕준상은 특유의 에너지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영화 속 가장 중요한 사건의 당사자인 주성직과 주영선 부녀 역의 김홍파와 정은채는 미스터리를 그려냈다.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지만, 두 인물의 얼굴에 힘이 담겨 있다. 김홍파는 권력을 뽐내고, 정은채는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 하나의 매력은 강동원과 이종석의 투샷이다. 이종석은 영일의 오랜 친구이자 업무 파트너 짝눈을 연기했다. 압도적인 미를 가진 두 배우가 한 프레임에 담기는 장면은 관객이 반길만한 포인트다. 영일은 짝눈과 추억을 통해 거대 악의 존재를 의심하고 불안해하는데,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이종석의 아우라가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설계자’는 오랜만에 깊이 생각할 작품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영화가 끝나고 나면 소용돌이를 체험한 기분이 든다. 독특한 소재를 신선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이 감독의 재능이 영민하게 느껴진다. 재미와 함께 의미도 고루 갖춘 명품 영화가 6월의 포문을 연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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